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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11/01/17 11:54
POSTED IN Essay
항상 입고 싶은 옷이 있었다. 입고 싶었다는 것은 입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왠지 더 입고 싶어지는 거다. 그것은 일종의 욕망이었다.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자가증식이 가능했다. 가끔은 그 욕망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허망할 뿐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가끔은 허망하지만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입고 싶은 옷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옷을 입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 그 옷을 입고 나서는 왠지 그 옷에 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허망한 욕망이 현실로 이뤄진 기쁨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옷을 입기 위해 인내했던 것의 보상이었다.

입던 옷을 벗고 싶을 때가 있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는 뭔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벗고 싶었던 거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단지 싫은 것만으로도 이유가 되는 거다. 가끔은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고 자위했다. 서러웠다. 하지만 또 그렇지만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어쨌든 난 그 옷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옷에 대해 이제까지 몰랐던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한참 뒤 나는 그 옷을 벗지 않고도 왠지 편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포기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옷을 벗기 위해 궁리했던 것의 보상이었다.

내가 입어야하는 옷과 버려야하는 옷이 무엇인지, 또 언제 갈아입어야하는지 간절하게 알고 싶지만 나는 자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맞지 않는 옷을 갖고싶어한다.

편의점 냉장고

PUBLISHED 2011/01/17 11:53
POSTED IN Story
편의점 냉장고만큼 불쌍한 존재는 없다. 365일 쉬는 날 없는 편의점에서, 밤이고 낮이고 모터를 돌려야 한다. 차라리 전등이면 좀 나았을 것이다. 낮에는 꺼놓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편의점 냉장고에게는 단 1초의 휴식도 용납되지 않는다.

냉장고의 고단한 삶은 단지 냉장고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냉장고가 멈추는 순간 냉장고가 품고 있던 것들은 녹거나 상한다. 그것은 편의점 사장님에게도 아이스크림을 찾는 꼬마 손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냉장고는 잘 알고 있었다. 편의점에 처음 들어온 그날부터, 그것은 받아들여야할 숙명이었다. 

게다가 냉장고에게 딱히 다른 선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모터의 수명이 다하면 책임도 끝나겠지만, 냉장고는 일부러 빨리 고장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루하루가 썩 재미있지도 않았다. 가끔 시지포스는 무슨 생각을 하며 바위를 들고 있을까...하며 딴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형편인데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나마 요즘들어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조금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그렇다. 핸드폰이란 작은 녀석도, 사무실 컴퓨터도, 자동차 공장의 로보트 손도...죽기 전까지 쉬지 않는다. 그리고 죽으면 쉰다.

죽으면 쉰다? 하지만 쉰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다.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무엇인가 끝났다는 것 정도? 그런데 무엇이 끝난 건지도 모르겠다. 한 평생 모터를 쉬지 않고 돌리는 행위의 끝이랄까? 그런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괜히 멋진 이름을 붙여볼까했는데, 그래봐야 쉬지 않고 모터를 돌린 것이 전부다.

그래서 냉장고는 열심히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농땡이를 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모터를 돌린다. 슬플 것도 없고 멋질 것도 없이 모터를 돌린다. 편의점 한쪽 모퉁이에 박혀버린 냉장고는 아무곳도 가지 않는다. 365일 밤이고 낯이고 복잡한 생각일랑 다 잊은 채 모터를 돌린다.

일기

PUBLISHED 2010/08/09 20:45
POSTED IN Essay
장진 감독은 "나에게 영화란 일기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 구석구석이 영화 속에 담겨있어서 일기 같다는 거다. 매일 매일을 살며 일기처럼 기록하는 감독이 부럽다. 마치 피아노나 플룻 같은 약기를 다룰 줄 아는 친구를 보는 것처럼. 감독은 영화 화면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신의 삶과 꿈을 멋지게 기록한다.

예전에 "일기 쓰지 않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기록이란 게 별 거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꿈이다. 흐름 속의 멈춤이고, 행동 속의 사색이다. 어쩔 땐 명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쉽다. 펜가 노트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기는 더더욱 좋은 친구다.

그런 나 역시 일기를 꾸준히 쓰지 못한다. 특히, 실제 삶이 파란만장해서 쓸 게 많을 때일수록 일기를 더 못 쓴다. 그러다 감정의 폭풍이 잦아들 때쯤에서야 비로서 먼지 쌓이 일기장을 꺼낸다. 그리고 몇 자 끄적인다. 마치 세상을 떠돌다 고향집에 온 것처럼, 거친 풍파 속에서 결국 어릴적 친구를 다시 찾은 것 같은 평온을 느낀다. 그래서 일기장 속의 나는 왠지 조금 센티하다.

삶을 잊지 말자. 삶을 잃지 말자. 매순간 땀흘리며 살고, 당당하게 기록해두자. 나를 돌아보고 한순간이라도 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자.